정보시대의 선진한국을 가능케한 행정전산망사업과 주전산기국산화사업 성공비화
<뒤 늦게 나마 이런 글을 쓰게 된 배경>
2019년 현재 우리나라의 위상:
# 한국의 공공부문 & 민간부문 정보화 수준 : 세계 최고 수준
# 한국의 정보통신인프라 : 세계최고 수준
# 한국의 정보통신산업 : 세계최고 수준
이런 상황은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볼 수없는 기적같은 상황으로서 우리나라가 이룬 위대한 업적임이 분명하다. 이런 일을 가능하게 만든 것이 바로 1980년대 정부주도로 강력하게 추진되었던 범국가적 과제로서의 행정전산망 사업과 주전산기 국산화 사업이었다. 1990년대 들어 이 사업의 결실로 전국적인 전산망이 공공부문을 중심으로 구현됨으로서 사회의 고도정보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또한 국내기업들의 정보산업 능력이 혁신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고 따라서 민간부문에서도 고도정보화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2000년대 들어서면서 이러한 전산망들이 인터넷으로 진화되어 세계최고수준의 고도정보화사회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다.
당시 이 사업에서 일익을 담당했던 내 자신이 그일을 떠나서 학교로 간 후 이 일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가 정년 후 최근에 늦게 나마 관심을 가지고 인터넷을 섭렵하면서 조사를 해 보았는데 놀랍게도 우리나라가 이룬 이런 세계적 업적에 대한 기록이 아주 미미한 수준으로 거의 잊혀져 가고 있음을 깨닫게 되어 안타깝기 그지 없고 나 또한 여지껒 당시의 기록을 남기지 않은 책임감도 느껴져 이제 비록 많이 늦었지만 그래도 지금이라도 내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기억들을 정리해서 후대에 남기고자 이 글을 쓰는 것이다.
2019.12 백 인섭 (데이콤 초대 연구소장, 한국전산원 표준화본부장,아주대학교정보통신대학 교수)
1) 3단계(1988~1994, 1995~2000, 2000~2010) 국가발전전략 제시.
2) 3단계에서 정보선진국 세계 5위권 목표
3) 정부주도(정부:민간= 50:50)-------> 민간주도 + 정부지원 (정부:민간= 25:75) ------> 민간주도
# 개요
가. 전산망사업의 방향
행정업무 전산화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70년 4월 경제기획원의 예산업무 전산화를 대통령에게 시범을 보인 이후 그 이듬해 체신부가 방대한 양의 전화요금 업무를, 관세청·관상대·전매청·서울시 등 각 기관들이 자체 고유업무를 각각 전산화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이 산발적으로 추진되어온 행정업무의 전산화를 국가적인 차원에서 묶어 종합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1975년 정부는 총무처에 행정전산화추진위원회를 설치하고 국가적인 행정전산화를 추진하는 데 필요한 근거 규정을 제정하여 기본계획을 수립했다. 그 이듬해 제1차 행정전산화기본계획이 수립되어 지금까지 기관별로 추진되던 행정전산화를 기본계획의 틀 안에서 추진되도록 했다.
제5공화국 이 들어서면서 ‘작고 효율적인 정부 ’가 정부의 비전으로 제시되면서 행정업무의 전산화가 강조되었다. 이러한 주장은 당시 청와대 경제비서실에서 자주 나왔는데, 이들은 행정업무 전산화의 공급측면인 전자산업 육성에 큰 비중을 두었다. 1980년대 초반 우리나라 전자산업은 아직 초기단계였고 정보산업은 매우 취약한 상태였다 . 정부는 전산화와 정보산업 육성을 상호 연계시킨다는 취지 아래 1981년에 반도체공업육성위원회를 구성하고 반도체·컴퓨터·전자교환기를 3대 전략품목으로 집중개발하기로 결정했다. 1983년 3월에는 반도체 및 정보산업육성위원회에서 종합적인 정보산업 육성방안을 마련했다.
이 3대 품목 중 반도체는 당시 초기 보급단계였던 컬러TV 덕분에 수요가 엄청나게 늘어났고 전자교환기도 전화가 급속히 보급되던 시기였으므로 수요가 충분했다. 그러나 컴퓨터는 개발한다고 해도 시장이 없었기 때문에 정부가 행정업무 전산화사업을 통해 수요를 창출하기로 했다.
나. 행정전산망사업
행정업무 전산화를 위한 행정전산망 계획은 처음에는 여러 행정기관을 묶는 계획에서 점점 그 범위가 확대되어 전국 금융기관·교육기관 그리고 국방 및 안보까지 포괄하게 되면서 그 명칭도 국가기간전산망 으로 바뀌게 되었다. 1983년 7월 국가기간전산망사업계획안 이 수립되었는데 이 사업의 목표는 2000년대 초까지 선진국 수준의 정보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1990년대 중반까지 국가기간전산망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이 계획은 국가 사회 전반의 전산화와 함께 국내 정보산업 육성이라는 두 가지 정책적인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 다시 말해서 이 사업은 정부·금융기관·교육·연구기관 등 공공부문의 전산화를 통하여 효율적인 정부를 구현하고 국민의 편의를 증진하며 기업의 생산성을 제고시키는 한편, 전산망사업으로부터 발생하는 수요를 바탕으로 컴퓨터 등 전산망의 기본요소들을 개발하여 정보산업 발전을 도모하고자 하는 정부의 의지를 담고 있었다.
국가기간전산망사업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 선진국의 시행착오를 피하고 후발자의 이점을 살릴 수 있는 전략을 마련했다.
첫째, 국가기간전산망을 행정전산망·금융전산망·(교육·연구전산망)·국방전산망·공안전산망 등 5대 분야별 전산망으로 구분하여 조기에 완성하는 한편, 민간기업은 자율적 전산화를 촉진시키고 일반국민의 전산 이용능력을 제고시키기 위해 단말기 보급 및 범국민 전산교육을 강화해나가는 것이었다.
둘째, 공공서비스의 근본적인 개선에 중점을 두어 국민 편의 증진업무를 우선적으로 추진하여 국민편의 위주의 행정체제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셋째, 기관별 전산망 구축에 기관간, 업무별 전산망 구성과 운영을 확대함으로써 전산망을 통한 공공기관간 업무협조를 확대해 나가고, 이를 위하 정보의 공동활용과 기기 및 기술의 호환성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넷째,전산화에 소요되는 비용을 국내 정보산업 육성에 활용 하여 전산망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시스템을 국산화하고 전산망 구축과 운영을 우리 기술로 하는 것이었다.
이 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법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1986년 5월 ‘전산망보급확장과 이용촉진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였고 , 정부는 이 법에 의거하여 국가기간전산망사업 추진과 관련 정책의 심의·조정을 위해 1987년 5월 대통령 산하에 전산망조정위원회 를 설치했다. 위원장은 전산망 사업 계획단계에서는 관련 부처간 긴밀한 협조와 업무조정을 위하여 대통령비서실장이 맡아오다가 본격적인 추진단계에 접어 든 1989년 6월부터는 체신부장관이 맡게 되었다. 위원은 상공부·체신부·과학기술처 등 정보산업 관련 부처, 총무처·한국은행·교육부·국방부·안기부 등 분야별 전산망추진위원회 대표, 그리고 경제기획원·재무부·내무부 등 관련 부처 차관급과 한국전산원장으로 구성되었다.
위원회는 국가기간전산망사업 기본계획 심의·조정, 소요자금 조달 및 상환 심의·조정, 이 사업과 관련된 기술 및 기기 도입 및 개발에 관한 심의·조정 등의 임무를 수행했는데, 위원회에 상정될 안건을 사전에 검토하기 위해서 위원들이 소속된 부처의 실무책임자들로 구성된 실무위원회가 운영되었다. 또한 위원회의 실무행정업무를 지원하기 위하여 관계부처로부터 파견된 공무원 및 관련기관 직원으로 구성된 전산망조정위원회 사무국 을 운영하여 오다가 1991년 1월부터는 체신부에 신설된 정보통신국이 사무국 역할을 수행했다.
국가기간전산망사업은 5대 기간전산망별로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운영했는데, 각 추진위원회에는 관련 업무를 총괄하는 총괄기관과 업무별 주관기관이 있고 주요 업무의 전산화와 전산망구축을 전담하는 사업자가 지정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행정망은 데이콤이, 금융망은 금융결제원이, 교육·연구망은 시스템공학연구센터가 각각 전담사업자 로 지정되었다.
국가기간전산망 사업 중 핵심은 행정전산망사업이었으며, 주민등록관리·부동산관리·고용관리·통관관리·경제통계·자동차관리 등 6개 사업이 우선추진업무로 선정되어 1985년부터 시작되었고 1987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6개의 우선추진업무 중 가장 비중이 큰 업무는 국민의 기본 인적사항을 컴퓨터에 수록하고 전국의 읍·면·동사무소를 온라인으로 연결하는 사업으로서 이 사업은 국민생활과 관련된 각급기관의 다양한 대민서비스 업무를 전산화하기 위해 반드시 선행되어야하는 기반사업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사업 추진 중에 과오로 인하여 개인별 인적사항이 잘못 입력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1990년 6월부터 8월까지 모든 국민에게 주민등록 관련 입력자료를 배부하여 개개인이 직접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또 기존 주민등록표와 대조하는 작업을 거치는 등 정확성을 기했다.
1991년 1월부터 거주지 단위로 주민등록등본 발급서비스 가 개시된 후 거주지와 무관하게 제공되는 전국 온라인서비스가 현재까지 제공되고 있다.그리고 전국 3200만 필지의 토지 및 임야대장을 전산화하는 부동산관리업무 는 전국 시·군·구를 온라인으로 연결하여 1991년 2월부터 전국 온라인서비스를 실시해왔다. 전국 자동차 등록사항을 전산화하는 자동차관리업무 는 자동차등록사무소 등 전국 133개 기관을 온라인으로 연결하고 1990년 3월부터 대민 서비스를 개시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출입 통관수속 및 보세화물 관리 등을 전산화한 통관관리업무 는 세관·관세사·은행 등 109개 기관을 온라인으로 연결하여 1990년 4월에 대민 서비스를 개시했다.
구인 및 구직 관련 광역고용정보망 구축을 목표로 하는 고용관리업무 는 취업알선·사업장 관리·직업지도 업무의 전산화와 함께 전국 49개 노동부 지방사무소를 온라인으로 연결하여 1990년부터 전국 서비스를 시작했다. 국가 기본통계자료 전산화를 목표로 하는 경제통계관리업무 는 통계청에서 주관하여 물가·인구·산업생산 등 20개 부문의 통계자료를 1991년 1월부터 온라인으로 제공했다.
행정전산망사업에는 앞서 소개한 6개 우선추진업무 이외에도 34개 기관의 45개 기존업무, 그리고 31개 기관의 40개 계획업무가 있었다. 기존업무는 이미 각 기관이 개발하여 운영중인 업무로서 우선추진업무가 완성되면 상호 연계하여 운영해야 하며, 계획업무는 우선 추진업무 이외에 신규로 추진할 사업으로서 각 주관기관이 소관 예산 범위 내에서 자체적으로 추진할 사업들이다.
다. 기타 전산망사업
금융전산망사업은 파급효과가 큰 은행전산망 구축에 중점을 두고 추진했다. 종래에는 단위 은행별로 본점과 지점간에 온라인망을 구축하여 운용하던 방식에서 서로 다른 은행의 주전산기간 연계를 추진함으로써 1992년 12월까지 전국 31개 은행의 4387개 지점을 온라인으로 연결했다. 이 사업은 전담기관인 금융결제원과 참여 은행들이 공동으로 추진하여 1988년 7월부터 거래은행과 관계없이 현금인출이 가능한 현금자동인출기 공동이용시스템을, 1989년 4월에는 전화기를 이용하여 예금잔액·신용카드 이용내역 등을 조회할 수 있는 자동응답서비스를, 그리고 1989년 12월부터는 다른 은행으로 즉시 송금할 수 있는 타행환시스템을 운용했다.
교육전산망사업은 각급 교육기관에 선진국 수준의 컴퓨터 이용환경을 조성하여 정보사회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정보인력 양성과 학교 내 컴퓨터 교육을 지원하는 것을 주요 골자로 했다. 그밖에도 대학 전산화·도서관 전산화·학술정보DB 구축·교육행정망·교육전산망 구축 등도 주요 사업에 포함시켰다. 교육부에서는 초·중·고교에 컴퓨터와 관련된 교육과정을 신설하고 1990년부터 PC를 보급하기 시작했다.
연구전산망사업은 연구기관의 연구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추진하는 사업으로서 대덕연구단지를 중심으로 시범연구망을 구축하고 서울·대덕·광주·부산·대구·포항·창원에 지역지원센터를 설치하여 시스템공학연구소의 슈퍼컴퓨터를 중심으로 국내 대학 및 연구 기관의 주전산기를 상호 연결했다. 이에 따라 연구전산망에 연결한 대학과 연구기관 상호간은 물론 해외 연구소와도 정보를 교환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슈퍼컴퓨터를 도입하여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공동으로 이용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었다.
국가기간전산망사업은 1991년 말에 1단계 주요사업이 마무리되었다. 1단계 기간 중에 행정전산망사업에 1479억 원, 금융전산망사업에 185억 원, 그리고 교육·연구전산망사업에 452억 원이 투입되었다. 국가기간전산망 1단계 사업을 통하여 국가운영의 주요자원인 주민등록·토지·금융 등이 데이터베이스화되어 전산망을 통해 서비스가 제공됨으로써 국민의 편익을 증진시키고 업무의 효율성을 제고시켰으며, 앞으로 다른 정보화사업을 위한 기반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부처간 협조가 부족하고 책임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정보의 공동활용이 미흡했는데 이 문제는 오늘날까지도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또한 사업을 추진하면서 전산망 구축에 따른 역기능 방지도 함께 추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전산망의 안전성과 신뢰성 문제 그리고 정보의 불법유출 등 역기능이 발생했다.
행정망과 금융망에 비해 교육·연구망과 국방망 등은 관련 예산 부족, 추진체계의 문제점 등 때문에 기대했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기초적인 시범망만 구성했다.
라. 전산망사업의 지속 추진
정보산업 육성 측면에서 볼 때 국가기간전산망사업을 추진할 당시만 해도 중형급 이상 컴퓨터는 100%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으나 국산 주전산기 개발사업을 추진하여 사업기간중 중형 컴퓨터 기술력을 어느 정도 확보했다. 해외 원천기술을 도입하여 국산화한 주전산기 Ⅰ(톨러런트)239대를 정부기관 등 에 설치했으며, 국내 기술 위주인 주전산기 Ⅱ(타이콤)도 1993년 12월에 개발하여 보급되었다. 그러나 국산 주전산기는 시스템의 안정성이 떨어져 전산망이 자주 다운되고 유지보수에도 애로가 많아 전산 실무자의 불평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오늘날 전자정부사업 추진에서 발생하는 것과 같은 문제점들이 발생했다. 각 부처는 나름대로 추진체계와 조직 그리고 예산을 확보하여 독립적으로 추진하였으므로 데이콤이 전담사업자로 선정된 것이 각 부처 입장에서는 못마땅했다.
또한 사업 추진을 위한 예산확보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당시 이러한 문제들을 뒤에서 해결하는 역할을 체신부가 담당하였는데 특히 ‘선투자 후정산’이라는, 공직사회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획기적인 파이낸싱 방법을 도입하여 사업을 신속히 추진했던 점은 특기할 만하다. 선투자 후정산 방식이란 어느 부처든지 행정망 사업을 요청하면 전담사업자인 데이콤이 먼저 투자하여 사업을 수행하고 사업대금은 나중에 예산에 반영시켜 정산하는 다분히 변칙적인 회계처리 방식이었다. 체신부는 데이콤에게 선투자 자금을 마련해주기 위해 1986년 5월 한국통신진흥(주)을 설립하기도 했다.
감사원이 전문적인 지식이 요구되는, 그리고 일반적인 행정절차를 따르지 않은 행정망사업에 대한 감사를 할 경우 자칫 사업이 표류될 가능성도 있었다. 이에 따라 행정망사업에 대한 감사를 전문 감사기관에게 맡기기 위해 1987년 1월 행정전산망사업 감리기관으로 한국전산원 을 발족했다. 한국전산원은 행정망사업에 대한 감리뿐만 아니라 행정망 관련기술의 표준화 ·행정망의 운영지원 임무도 주어졌다.
1990년대에 들어서도 국가기간전산망사업은 계속되었다. 정부는 1991년까지 추진해 온 사업의 성과를 바탕으로 이 사업을 보완·확대하기 위해 1992년 2월 2단계 국가기간전산망사업 을 확정했다. 2단계 사업은 1992년부터 1996년까지 추진할 예정으로 기존 1단계사업에서 추진하여 왔던 사업들을 지속적으로 보완·발전시켜 나가면서 행정정보의 공동활용을 위한 전산시스템의 연계운영과 정보화역기능에 대한 대책 마련 등에 중점을 두었다.
주요 추진방향과 사업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작고 효율적인 정부 구현과 신속한 민원처리로 봉사행정을 구현하기 위하여 행정망 사업을 우선추진업무와 중점지원업무로 구분하여 추진했다. 우선추진업무는 국민 복지·우체국 종합서비스·기상정보 관리·해상화물 관리·지적재산권정보 관리·물품목록 관리·어선 관리 등 7개 업무였으며, 중점지원업무로는 경제통상업무·농업기술 정보관리·환경보전관리·국제종합관리 등이었다. 지방행정전산화를 촉진하기 위해 시·군·구 지방전산화 시범사업도 실시하였으며, 내무부는 정보사회에 대비하는 과학적 행정체제 구축을 목표로 지방행정전산화 기본계획을 수립하여 추진했다.
그 밖에도 1단계 사업의 우선추진업무들도 계속해서 보완하여 주민등록전산망은 주민등록 전출·입 일원화 시스템을 구축 완료하였고 여권발급전산망도 구축하여 1995년부터 전국 서비스를 실시했다. 1995년에는 토지종합정보망을 구축하여 토지실명제, 가구별 종합과세 등을 지원했다.
둘째, 금융전산망사업은 1단계 사업 기간 동안 구축한 은행간 공동망을 기반으로 기존 서비스를 개선하고 새로운 전자금융서비스를 개발했다. 특히 금융전산망 정보보호 강화에 역점을 두는 한편 투자금융·보험·증권 등 제2금융권의 공동전산망을 구축했다. 1994년 12월에는 금융기관간 거액의 자금거래를 EDI로 처리하는 한국은행 금융결제망이 가동되었으며, 1994년 9월에는 선불카드 발행사와 가맹점을 연결하여 모든 가맹점에서 선불카드를 이용할 수 있는 선불카드공동이용망을 구축하여 이용자들의 편의를 증진시켰다. 제2금융권의 전산망은 투자금융·보험·증권 등 영역별로 구축되어 서비스에 들어갔으며 그 후 망간 연계가 추진되어 1995년 4월 보험전산망과 무역자동화망 연계를 시작으로 은행망·체신금융망 등이 단계별로 진행되었다.
셋째, 교육·연구전산망은 1단계 사업에서 교육망과 연구망을 구분하여 구축하고 추후에 연계운영할 계획이었다. 2단계 사업의 목표는 두 전산망의 연계추진과 함께 구내·외 학술연구망과의 폭넓은 연계성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1단계 사업에서 추진하였던 초·중·고교 컴퓨터 보급지원사업을 지속적으로 확대하는 한편, 대학의 전산자원을 확충하기 위해 정보통신부는 타이콤 주전산기를 전국 12개 대학에 지원하였고 교육부는 IBRD 차관을 도입하여 대학 도서관의 도서관 전산화와 LAN 구축을 지원했다. 연구전산망사업에서는 인터넷 접속을 고속화하고 이용기관을 확대하는 한편, 미국·유럽·일본 등지의 연구망들과 연계를 추진하였으며, 이용기관이 늘어남에 따라 시스템공학연구소에 슈퍼컴퓨터를 추가로 도입하여 컴퓨팅 서비스를 확충했다.
1단계 사업은 대통령 비서실 주도의 사업추진과 부처간 업무조정 그리고 선추진 후정산과 같은 획기적인 파이낸싱 방식 등을 통해 종합적이고 신속하게 추진했다. 그러나 1단계 사업을 통해 사업 추진기반이 갖추어졌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2단계 사업부터는 주관기관이 스스로의 권한과 책임 아래 자율적으로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그리고 선투자 후정산 방식도 더 이상 적용되지 못했다. 그 결과 전반적으로 사업 추진이 지연되었고 종합적 사업 추진이 아닌 부처별 추진 양상을 띠게 되었다. 특히 교육망과 연구망의 연계는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고, 부처간 기관간 전산망의 연계운용도 미진했다. 이와 같이 2단계 사업 추진상의 애로가 노정되고 있는 와중에 1996년 정보화촉진기본계획이 확정되었다. 본래 1996년까지 계속될 예정이었던 국가기간전산망 2단계 사업의 남은 과제들은 이 계획에 흡수되었다.
국가기간전산망사업은 건국 이래 최초의 범국가적 정보화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이 사업을 구상한 사람들은 나중에 수립된 정보화촉진기본계획이나 ‘Cyber Korea 21’과 마찬가지로 산업발전과 사회발전이라는 두 가지 중심축을 바탕으로 밑그림을 그렸다. 이 사업은 행정망·금융망·교육연구망·국방망·공안망 등 5대 망 구축과 운영 합리화에 초점을 두었는데, 각 세부계획에서도 기본적인 목표와 추진방향이 오늘날 정보화 계획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그 동안 정보통신기술의 눈부신 발전과 주변여건의 변화로 정보화 수단과 추진전략이 달라졌을 뿐이었다.
# 태동배경
개각과 국가기간전산망사업계획
5공화국시절인 85년 2월18일에 있었던 개각은 22개 부처 가운데 12개 부처 장관이 경질된 전면 개각이었다. 진의종 총리가 물러가고 노신영 안기부장이 새로운 총리에 기용된 이 개각구도를 놓고 언론들은 대체적으로 「5공화국의 체제 강화」라는 정치적 해석에 거의 이의가 없었다. 전면 개각을 단행한 이 장관의 스캔들이나 경제정책의 실패에 따라 경제팀이 물갈이된 상황도 아니었다. 경제팀의 경우 경제기획원, 재무부, 농수산수, 상공부, 동자부, 건설부, 체신부, 교통부, 과기처 등 9개 부처 가운데 경질된 각료는 과기처, 체신부, 농수산부 장관 뿐이었다.
그러나 개각 자체가 워낙 정치성이 짙어 미쳐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지만 컴퓨터를 포함해서 정보산업 분야에 국한해 본다면 이 개각은 분명 의미가 있었다. 과기처, 상공부, 체신부, 총무처 등 당시 우리나라 정보산업 정책경쟁을 벌이던 4개 부처 가운데 3개 부처의 장관이 새로 기용됐기 때문이었다.
이들 4명의 정보팀 장관 가운데 금진호 상공부 장관만 유임됐다. 신임 과기처 장관에는 육사11기 출신의 김성진 체신부 장관, 체신부 장관에는 이자헌 민정당 의원, 총무처 장관에는 박세직 안기부 차장이 각각 기용됐다. 얼핏보면 매우 평범한 모양새였으나 정보팀 장관 개개인을 살펴보면 나름대로 정치적 배경과 실력을 갖고 있었다. 장관들의 이같은 면모는 아직 독자산업이 되지 못하고 있던 정보산업 주도권을 놓고 4개 부처가 벌여온 정책경쟁이 새로운 국면에 들어설 것임을 예고하는 대목이었다.
2.18개각 당시는 때마침 대통령 비서실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국가기간전산산망조정위원회에 의해 5대 국가기간전산망 사업추진 계획이 범부처적으로 수립되는 단계였다. 5대 국가기간전산망에 대한 규모나 의미는 구체적인 계획이 짜여지지 않았더라도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능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작게는 정보산업에 대한 비전이, 크게는 정보화사회와 국가경쟁력의 관건이 이 사업에 달려 있었다. 84년 12월 행정망 계획이 마련된 이후 중간계획이 작성될 때마다 수시로 핫라인을 통해 청와대에 보고됐고 이 때문에 과기처와 체신부 등 관계부처 공무원들 사이에서도 뜨거운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국가기간전산망사업의 추진주체에 따라 부처의 존망이 판가름날 지경이었다. 체신부 통신정책국에서 재직했던 서기관 Y씨는 2.18개각 때 정보팀 장관들에 대한 관련부처의 분위기를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4명의 장관 모두 재직시 강력한 정치적 소신을 보여줬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체신부에서 과기처로 자리를 옮긴 김성진 장관은 예외적으로 정통 테크노크라트 계열로 분류됐죠. 예비역 육군 준장이었지만 이학박사와 공학박사로서 국방과학연구소장을 역임하기도 했었으니까요. 물론 금진호 장관의 경우는 정치적 파워와 업무추진력이 함께 뛰어나 상공부 직원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받았던 것으로 들었습니다만 이자헌 장관이나 박세직 장관은 추진력과는 별개로 실무분야에서는 해당부처에서 이견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실제 체신부의 경우 83년경부터 주된 정책방향이 전기통신과 정보산업의 접목으로 모아지고 있었던 터라 장관 역시 실무에 밝은 테크노크라트였으면 하는 바램이 직원들의 정서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당시 체신부 차관은 오명 전 건설교통부 장관이었는데 그가 워낙 통신분야에 밝아 김성진 장관을 대신 과기처로 보냈다는 설이 회자되고 있기도 했다.
총무처 역시 국가기간전산망조정위원회가 마련한 「행정전산망사업 추진계획」이 대통령에 보고돼 이 계획에 대한 보완과 기초조사를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장관이 바뀌었다. 총무처는 이를테면 국가기간전산망 추진을 위한 전자정보통신팀의 주관부처로서의 새로운 역할이 기다리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이에 반해 그때까지 사실상 정보산업 영역을 양분해 오던 과기처와 상공부는 비교적 느긋한 입장이었다. 과기처의 경우 전임 이정오 장관(현 한국과학기술원 석좌교수) 역시 실무정책에 밝은 군출신 테크노크라트였으나 추진력에서는 신임 김장관이 앞설 것이라는 기대가 우세했다. 상공부에서도 상공부 기획관리실장, 국보위 상공분과위원장, 5공화국 출범 상공부 차관 경력을 가진 금진호 장관의 유임을 크게 반기는 분위기였다.
2.18개각에 대에 대한 의미는 개각 직후부터 시작된 부처별 새해 업무보고 등을 통해 드러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각 부처들은 2∼3년내에 본격 추진될 국가기간전산망 사업의 이니셔티브를 의식, 요란한 정보산업 육성계획들을 쏟아 내놨다.
개각 후 하루가 지난 2월19일 상공부가 먼저 「85년도 컴퓨터산업 육성계획」이라는 것을 내놓았다. 주요 기기 및 부품의 국산화, 국산 컴퓨터 개발 여건조성, 컴퓨터산업의 수출산업화, 컴퓨터 이용기술의 확대, 전문인력 양성 등 5대 시책이 골자였다.
이에 앞서 84년 상공부는 전자산업부문 생산규모를 전년도의 2.5배인 75억 달러로 신장시켰고 26억 달러이던 수출액도 45억 달러로 늘려 놓았다.당시 대통령<절대지존 전두환 대통령>의 관심은 온통 전자산업의 확대발전 이었는데 금진호 장관이 유임 된 것도 바로 이같은 성과 때문이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었다.
이 여세를 몰아 상공부는 5대 시책을 통해 설비투자를 확대하고 국산화 여건와 국제경쟁력을 성숙시켜 컴퓨터부문의 독자산업화를 시도하고 나선 것이었다. 이 계획 작업에 참여했던 전자전기공업국 소속 과장이었던 L씨의 회고.
『국가기간전산망사업은 물론 86아시안 게임 및 88올림픽 특수를 앞두고 있었던 상황에서 상공부의 컴퓨터산업 육성계획 수립 방침은 매우 의욕적이었습니다. 우선 국산화 작업을 통해 주요 사업의 이니셔티브를 쥘 요량이었습니다. 84년이 기반 구축의 해였다면 85년은 내실을 기하는 해로 정했지요. 우선 컴퓨터 국산화와 수출을 촉진시키겠다는 방침 아래 이미 전자 부문에서 풍부한 민관 매개역할 경험을 갖고 있는 한국전자공업진흥회를 전면에 내세우기 했습니다. 실제 기업들에 대한 관세 감면, 전자공업진흥기금 지원, 인력양성 등의 업무가 한국전자공업진흥회에 의해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상공부가 컴퓨터 육성계획 을 발표하자 그로부터 1주일 뒤 이번에는 장관이 바뀐 과기처가 「정보산업 집중육성 10개년 계획」이라는 것을 내놓았다. 물론 이 계획은 과기처가 84년부터 준비해 오던 정보산업에 대한 중장기 마스터플랜이긴 했으나 『기술 주도의 경제사회 발전을 계획을 적극 펼쳐 나가겠다』고 취임식에서 밝힌 김성진 장관의 의지가 그대로 반영된 것이기도 해서 더욱 주목을 끌었다.
10개년 계획은 85년부 94년까지 10년동안 우리나라 정보산업 생산규모를 각각 국민총생산의 25%, 수출액의 20%까지 끌어 올리며 전국 규모의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을 전제로 전국민의 30% 이상이 가정용 컴퓨터 단말기(홈터미널)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 골자였다. 여기에는 또 매년 4백명의 박사와 2천명의 석사를 배출한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당시 과기처 정보산업기술국 소속 사무관으로서 「정보산업 집중육성 10개년 계획」에 참여했던 L씨의 회고.
『사실 과기처는 처음부터, 그러니까 컴퓨터가 처음 도입되던 60년대 말부터 정보산업 정책 전담부처로서 위치와 자존심을 지키려 고심했습니다.사실 과기처가 상공부나 체신부의 견제에 대해 그렇게 크게 신경쓴 것 같지는 않았는데 언론이나 업계가 앞서 대립적 상황으로 몰고가곤 했죠. 10개년 계획도 그런 차원에서 마련됐습니다. 상공부 등이 미미컴퓨터니, 프린터니 하는 구체적 품목들의 국산화를 실현하겠다는 식의 육성계획을 내놓았다면 과기처는 더욱 포괄적이고 지표적인 육성계획을 내놓아야 된다는 것이 기본 방침워었죠. 이런 관점에서 산업표준 제정이나 저작보호에서부터 음성인식이나 한글처리인터페이스등 기반기술에 이르기까지 산업 파급효과와 연관효과가 높은 분야에 대한 중장기 계획을 정리한 것이 바로 「정보산업 집중육성 10개년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상공부의 컴퓨터산업육성계획이나 과기처의 정보산업 집중육성계획은 그 내용의 표현방식이나 각론 등에서만 차이가 있었을 뿐 각 정책이 지향하는 바나 목적은 대동소이한 것이었다. 에컨대 상공부가 민간기업과 공동으로 32비트 유닉스컴퓨터를 단계적으로 개발하겠다는 것이나 과기처가 90년도까지 32비트 마이크로컴퓨터시스템의 개발을 완료하겠다는 식의 계획은 내용적으로도 유사할 뿐 아니라 정부 예산 집행 측면에서도 이중 투자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 그런점에서 본다면 장관이 바뀐 체신부가 업무보고에서 내놓은 의욕적인 육성계획 역시 두 부처의 그것들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체신부는 85년 업 무보고에서 국가기간전산망의 구성추진을 비롯 초고집적반도체(VLSI)와 32비트 컴퓨터의 개발과 전문 기술인력양성 등 다양한 분야의 정보산업육성 계획 을 내놨다. 체신부는 이같은 계획들을 85년 3월에 출범한 한국전자통신연구소(ETRI)를 통해 추진함으로써 국가기간전산망 사업 추진 주체로서 가장 유리한 입장에 선다는 방침이었다.
아뭏튼 상공부, 과기처, 체신부 등이 2.18개각을 계기로 쏟아 놓은 산업육성정책들은 국가기간전산망 사업 추진을 계기로 확대발전의 길을 걷기 시작한 컴퓨터 산업 분야가 다양한 실험과정을 걷게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부처별로 재래식 기술주도형 발전계획이 난립하고 있었다.
당시 정부 부처 단위 또는 민간기업 차원에서 개별적인 전산화는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은행·증권사·출연연구소 등에서 온라인 업무와 행정업무를 수행하기 위한 크고 작은 컴퓨터 네트워크를 구성했다.
그러나 문제가 많았다. 대규모 중복 투자가 발생했고, 표준화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아 호환도 되지 않았다. 효율성이 떨어지고 자료 활용에 제한이 많았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는 대부분 외국에 의존해야 했다. 전산화를 촉진하면 할수록 국부유출이 심해지는 상황이었다.
<걱정-1> 전산화가 나라 말아먹을 판: 당시 한국에서 미국 컴퓨터회사로 지불되는 컴퓨터 렌트비용이 년 2억불 수준이었는데 그 중 50%가 공공부문이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별 매년 전산화예산은 증대하기만 하는 상황 -------> 이러다간 전산화를 통해서 경제성과 효율성 도모는 커녕 국가를 말아먹겠다는 위기감 고조되는 상황 !!
<걱정-2> 미래 선진국가가 되려면 ? 미래는 정보화시대<"Information Society">를 위한 준비--------> 국가사회정보화 & 정보산업육성 도모: 2마리 토끼 한번에 잡기 ------> 어떻게???
<걱정-3> 국가관리 전체가 전산망으로----> 수 많은 전용선망으로 국토가 뒤덥힐 판국
-----> 끔찍한 비용???
따라서 뭔가 획기적 해결책이 절실한 상황 !!!
<기상천외한 발상의 전환 >: 청와대 과학기술비서관실(홍성원 박사)와 체신부
오명 차관 그리고 한국데이타통신 이용태 사장 이상 3인이 삼총사가 되어 이 문제를 우리나라 자체 능력으로 해결하고자 몇 가지 기발한 발상을 해냈다.
전문가들도 이에 동의했고, 이는 국가기간전산망 사업을 장기간 지속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문제 해결은 물론이고 국가차원에서 경제성과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목표와 전략을 짜 나갔다. 결국 국가기간전산망 사업은 이런 여러 가지 문제를 하나하나 극복해 가는 과정의 결과물이었다.
◇ 이들은 세 가지 추진 전략을 세웠다. 첫 번째는 선진국의 시행착오를 피하고, 후발주자의 이점을 살리는 데 필요한 추진체계를 갖추는 것이었다. 국가기간전산망 구성과 운영에 사용될 1)
<발상-1> 기본 시스템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국산화하고, 통신 네트워크도 우리에게 적합한 정보고속도로 개념으로 건설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했다. 이는 국내 정보통신산업 육성 발판을 제공하게 된다. ===> 한국데이타통신(주) 설립해서 X25 파켓교환망을 전국적으로 구축 운영관리.
<발상-2> 공공부문에서 컴퓨터 이용자와 제공자 또는 관리자를 구분한다는 것이었다.
그동안은 각 이용기관별 전산화 담당자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네트워크 등 모든 정보화 수단과 전산화 업무 내용을 관리했다. 이런 방식으로는 전문성을 높이기 어렵다고 판단, 이용자는 이용만 하고 정보화 수단은 전문기관이나 기업이 제공해 전문성을 높인다는 원칙을 정했다.
====> 공공부문 전산화 "전담사업자" 지정.
<발상-3> 최소한 `기본 시스템`만큼은 우리 자본과 기술로 확보한다.
=====> "국가기간전산망" 구축사업을 국내정보산업 육성을 위한 초기 시장으로 활용.
=====> "주전산기 국산화 사업"추진
1단계) 한국데이타통신(주) 주관하에 국내 전자부문 4대민간기업 참여.
2단계) 한국전자통신연구소 주관 추진 및 구현.
<발상-4> 청와대 내 공공부문 전산화 및 정보산업 육성 조직 가동
국가기간전산망 사업 기획과 정책방향은 전산망조정위원회에서 맡았다. 우선 1981년부터 청와대 내부기구로 운영되고 있던 반도체공업육성위원회를 확대 개편해 `반도체 및 정보산업육성위원회`를 띄웠다. 1983년 7월의 일이었다. 대통령 비서실장이 위원장을 맡고, 각 부처 차관급이 위원으로 참여했다. 위원회는 그해 9월부터 230개 공공기관과 70여명의 관계 전문가 의견을 수렴, 12월에 대통령에게 `국가기간전산망 계획` 중간보고를 하기에 이른다.
중간보고서에는 △국가기간전산망을 행정망·금융망·교육연구망·국방망·공안망의 5대 전산망으로 나눠 개발·운영하고
====>대통령이 직접관장하는 국가적 사업: 극대화(조정력 & 추진력)
<발상-5> 총무처·과학기술처·상공부 등에 나뉘어 있던 공공기관 컴퓨터 도입 허가를 정보산업육성위원화가 일괄 처리 <사실상 전담사업자 주관>
이듬해인 1984년 6월. 정보산업육성위원회는 국가기간전산망조정위원회로 명칭을 변경, 5대 국가기간전산망 사업과 공공기관 컴퓨터 도입 업무를 전담하게 된다. 다른 업무는 과학기술 진흥을 위해 신설한 기술진흥심의위원회로 넘겼다.
국가기간전산망조정위원회는 1985년 5월에 `국가기간전산망 중간보고 및 행정전산망 추진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은 이후 1986년 `전산망 보급확장과 이용촉진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고, 1987년 7월 국가 정보화의 근간이 될 `국가기간전산망 통합 구축계획`이 발표된 이후 본격 추진된다.
◇세계 최고의 IT 인프라 갖추는 계기로서 국가기간전산망 추진체계
1987년 정권 교체 시기와 맞물려 청와대 주도에서 각 부처 중심으로 이전된다. 전산망조정위원회도 청와대에서 체신부 소속으로 옮겼다.
국가기간전산망 사업은 행정전산망 구축과 국산 주전산기 및 슈퍼컴퓨터 개발 프로젝트까지 이어지는 정보화의 거대한 물결을 이뤄내는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1990년대 지방정부와 공공기관까지 확대된 정보사회종합대책, 1996년에는 민간 부문을 포함한 범국가적인 정보화추진기본계획으로 이어졌다. 1980년대부터 21세기 초반까지 우리나라 정보화와 정보산업 발전을 아우르는 핵심 연결고리가 된 셈이다.
국가기간전산망 사업은 특히 우리나라가 세계 어느 나라보다 인터넷을 빨리 수용하고 소화할 수 있게 해 준 요인이 됐다는 평가도 받는다. 국가기간전산망 사업이 축적해 놓은 인프라와 마인드 효과가 그만큼 컸던 것이다.
사실 국가기간전산망 구축사업은 1980년대 초반까지는 세계 어느 나라도 감히 시도하지 못한 혁신적인 아이디어였다. 빌 게이츠와 로스페로 등 미국 정보산업계 거물들도 사업참여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찾아올 정도로 해외에서도 큰 관심을 끌었다. 국가기간전산망 구축 사업은 바로 우리나라를 IT 강국으로 우뚝 서게 한 토대를 세운 초석이었다.
<기본열쇄> 한 개의 화살로 두 마리의 토끼사냥 전술전략.
({공공부문 전산화}) 통합추진: "규모의 시장"<한개의 화살>
---->국가사회 정보화 및 정보산업육성!<2마리의 토끼 사냥>
===> <국가기간 전산망 사업 태동> 2005. 1. 9.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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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국가기간망사업 추진 행정전산망․금융전산망․교육연구전산망․국방전산망․공안전산망 등 5대 국가기간전산망 사업을 정부가 주도하겠다는 계획이 추진된 것은 5공화국 초기인 1983년부터다. 그러나 사업 추진에 대한 법적 근거가 마련된 것은 1986년 12월 31일 <전산망 보급확장과 이용촉진에 관한 법률시행령>이 국회를 통과하면서였다. 국가기간전산망 사업은 컴퓨터 수요의 창출, 체계적인 정보산업 육성정책의 필요성,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정부구현이라는 시대적 요구 등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추진된 것이었다. 또한 규모의 방대함에 있어서도 건국이래 최대의 국가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이 사업은 계획의 입안 과정에 참여했던 극소수의 관계자들만이 성공에 대한 확신을 가졌을 만큼 사업 자체에 적지 않은 도박적인 요소들이 개재돼 있었다. 또 여러 관련 부처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혀있는 등 사업 초기부터 극복해야 할 무리수나 난제가 도처에 하나 둘이 아니었다. 체신부가 기초해서 당시 여당인 민정당 안으로 국회에 제출됐던 <전산망 보급확장과 이용촉진에 관한 법률>의 제정 목적은 전산망(통신망)과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의 균형발전을 통해 정보산업을 육성하고 정보사회를 실현한다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는 한국전기통신공사와 같은 전기통신사업자의 전산망사업 참여, 전산망 소요 기기와 기술의 국산화 등이 주요 목표였다. 여기에는 또한 기술 호환성 확보를 위한 표준화사업의 추진과 전문인력 양성 등의 목표도 포함돼 있어 이 법률은 사실상 국가 차원의 정보산업 육성 계획의 실천방안이나 다름없었다. 법률의 제정에 앞서 국가기간전산망 사업 추진에 대한 지침이 처음 마련된 것은 국가기간전산망조정위원회가 1985년 5월 청와대에 보고한 <국가기간전산망 중간보고 및 행정전산망 추진계획(안)>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기 때문이었다. 이 계획안에는 각 전산망에 대한 망별 사업목표와 중점 추진사항, 추진전담기관 등이 구체적으로 적시돼 있었다. 행정전산망의 경우는 소프트웨어․하드웨어․통신․운영 등 부문별로 소요되는 예산 추정액이 나름대로 구체성을 띠었고 전산화에 따른 예산절감효과도 분석돼 있었다. 그러나 정부 공식 문건에서 국가기간전산망 사업 추진계획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이보다 더 거슬러 올라간 1983년 12월 대통령직속의 정보산업육성위원회가 보고한 <국가기간전산망 계획(안)>에서였다. 각계 200여 기관 및 전문가 의견을 토대로 작성된 이 계획안은 5대 국가기간전산망을 구성, 운영하는 목적에 대해 ‘국가 전체의 투자대비 효과를 최대화하고 국내 정보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것’이라고 적고 있다. 국가기간전산망 사업의 목표가 계획의 초기단계부터 정보산업 육성의 필요성에서 출발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국가기간전산망 계획(안)>은 6개월 뒤 <국가기간전산망 계획 추진보고>라는 문건으로 구체화됐다. 5대 기간전산망의 범위가 행정전산망․금융전산망․교육연구전산망․국방전산망․공안전산망으로 최종 압축된 것은 이 보고서에서였다. 이 보고서에서는 또한 청와대가 5대 망 사업 추진을 직접 관장하겠다는 내용도 있었는데 이를 위해 만든 기구가 바로 1984년 출범한 국가기간전산망조정위원회다. 위원장은 대통령비서실장이었고 각 위원은 총무처․상공부․체신부․과기처 등 소관부처 차관과 청와대 경제수석, 정무2수석, 교문수석 등이었다. 앞서 소개한 <국가기간전산망 중간보고 및 행정전산망 추진계획(안)>은 국가기간전산망조정위원회가 만든 첫 작품이나 다름없었다. 이 계획안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보고서 명칭에서도 나타나듯 행정전산망에 대한 비중과 위상이 높아졌다는 점이었다. 5대 망에 대해 각각의 비중을 동등하게 다뤘던 이전 문건들과는 판이하게 달라진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행정전산망에 소요되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및 통신망에 대한 규격표준화와 기술 국산화가 정보산업 발전에 미치게 될 파급효과를 구체적으로 적시했다. 또한 행정전산망에서의 경험은 나머지 4개 망 사업에도 그대로 적용한다고 못을 박아 놓고 있었다. 전산망조정위원회가 이 계획안에서 명시한 행정전산망 사업 추진에 소요될 자금 규모는 일부 사업이 시작된 86년부터 사업이 마무리되는 95년까지 10년간 모두 7607억 원이었다. 여기에는 주전산기 283대와 일선 관청에 투입할 다기능사무기기(16비트 PC) 2만7924대의 구입비용, 컴퓨터 전문인력 2830명의 인건비 등도 포함돼 있었다. 행정전산망에 대한 일련의 보고서나 계획안은 그렇지 않아도 당시 정보산업계로부터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었다. 기업 관계자들은 보고서의 자구 하나하나에 의미를 달리할 만큼 신경을 쓰던 터였다. 정부는 정보산업 육성을 위해 행정전산망과 관련해 가능한 모든 부분에 대해 민간업체 참여를 개방할 방침이었다. 당시 예산규모나 정보산업 시장규모를 감안할 때 소요자금 7607억 원은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행정전산망사업의 부처별 책임자는 각 부처의 차관으로 정해졌고 총괄부처는 총무처, 전체 설계와 기술지원 전담기관은 한국데이타통신(데이콤)이 각각 맡도록 했다. 계획안의 백미는 역시 행정전산망 사업에 참여하는 관련 부처가 많고 업무내용이 다양해 종합적인 조정통제기능이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해 놓은 부분이었다. 요지는 당분간 이 조정통제기능을 대통령 직속의 국가기간전산망조정위원회가 맡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였다. <야화-데이콤이 뭐길래 ?! > 그 동안 정부부처가 개별적으로 추진하던 전산화 작업<장비 도입 & 시스템 개발>이 모두 데이콤으로 이관 됨. 특별한 이유로 독자추진이 필요한 경우도 데이콤의 허락을 받아야 가능. 따라서 데이콤이 갑자기 정부부처의 머리 꼭지 위에 올라선 상황이 연출됨. 이런 내용들을 보다 구체화시킨 것이 1987년 2월에 완성된 최종판 <행정전산망 종합계획(안)>이었다. 1986년 12월 <전산망 보급확장과 이용촉진에 관한 법률시행령>이 제정되고 난 직후에 작성된 이 종합계획안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행정전산망 사업 추진을 위한 자금조달 방안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 동안 나온 보고서나 계획안들이 자금소요계획만을 명시했을 뿐 조달방법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안을 내놓지 못해 사업 자체가 졸속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하던 상황이었다. 예컨대 1986년 1월 전산망조정위원회가 발표한 <다기능 사무기기 보급계획(안)>의 경우 1986년 3월부터 1988년 2월까지 2년 간 일선 관청에 모두 5185대의 PC를 보급키로 돼 있지만 정작 중요한 자금 소요 계획은 빠져있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더욱이 이 같은 일정을 진행시키려면 당장 1986년부터 정부예산이 집행되도록 해야 했는데 청와대와 관련부처들은 1985년 정기국회 예산 심의 안에 관련 예산을 아예 상정조차 하지 않았다(실제 PC 보급계획은 상당한 차질을 빚어 87년부터 본격적인 보급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사례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국가기간전산망 사업에서 시스템설계와 소프트웨어개발 책임기관인 한국데이타통신 역시 예산이 확보되지 않아 2년이 지나도록 행정전산망 사업과 관련된 실질적인 업무는 단 한 건도 처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더욱이 당시 소프트웨어 개발과 같은 무형의 용역사업 분야는 국가예산 집행 대상에서 배제돼 있었고 예산회계법상 모든 예산은 사전심의를 거친 곳에만 집행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따라서 개발결과를 봐야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판단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 등 용역사업에는 예산집행을 위한 사전심의나 감리는 어떤 형태로든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이렇듯 자금 조달계획은 국가기간전산망 사업의 성패를 좌우할 최대 관건이었다. 그런 점에서 <행정전산망 종합계획(안)>에서 제시된 자금조달 방안은 큰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관련 부분을 그대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자금조달 방안> 1. 소요자금은 행정전산망 전담관리기관(한국데이타통신)을 통하여 한국전기통신공사가 선투자하고 행정전산망 완성 후 그 사용료 명목으로 정부예산에서 연차적으로 상환함.<사후정산> 2. 행정전산망 소요 컴퓨터시스템의 개발비․구입비․운영비 등에 대한 종합지원이 가능하도록 행정전산망 소요자금지원 전담회사를 한국전기통신공사 자회사로 설립해서 운영함. 한국전기통신공사의 자회사를 통해 모든 자금을 조달하겠다는 것은 애당초 청와대나 국가기간전산망조정위원회의 기본방침이었다. 한국전기통신공사가 한국데이타통신 등에 직접 투자할 수 없었던 것은 자금투자방식이 나중에 상환 받는 금융사업의 형태를 띠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한국전기통신공사 정관에는 금융사업을 할 수 없게 돼 있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1986년 11월 한국전기통신공사가 100% 출자해 출범한 회사가 한국통신진흥주식회사다. 한국통신진흥은 출범식과 함께 당장 1986년 76억 원을 비롯해서 1987년에 683억 원과 1988년 754억 원 등 모두 1513억 원의 자금을 한국데이타통신에 지원한다고 발표했다. 국가기간전산망의 시범 사업격인 행정전산망 사업 추진에 대한 역사적 물꼬가 터지는 순간이었다. 이어서 1986년 12월에는 공기업인 한국전기통신공사가 지원한 자금을 집행해주기 위한 사전 감리(심의)기관인 한국전산원이 설립됐다. 국가기간전산망 사업 추진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한 셈이었다. 1983년 <정보산업육성방안>이 대통령에 보고된 이후 1986년 12월 <전산망 보급확장과 이용촉진에 관한 법률 시행령>이 통과되기까지의 일지를 정리해보면 <표>와 같다. <표> 국가기간전산망 사업계획 추진일지(1983~1986) | ||
1983.3. | 정보산업 육성방안 대통령에 보고-경제수석 *정보산업의 효율적 육성을 위해 정보산업육성위원회를 구성함. | |
1983.7. | 국가기간전산망 계획 관련 사항 보고-경제수석 *전체 전산화 체계는 국방망․정보망․행정망이 포함된 국가기간전산 망을 중심으로 구성 연결되는 것이 바람직함. | |
1983.10. | 국가기간전산망 계획 구상(안)에 대한 200여 공공기관 및 전문가의 의 견 청취-정보산업육성위원회 | |
1983.12. | 국가기간전산망 계획(안) 보고-정보산업육성위원회 *국가기간전산망을 5개 망으로 하고 각 기관을 이용자로서 소관업무 개선에 중점을 두고 전산망 설치 운영 등 기술 사항은 전산전문기관 이 책임지고 지원토록 함. | |
1984.6. | 정보산업육성위원회를 해체하고 국가기간전산망 조정위원회를 구성. | |
1984.6. | 국가기간전산망 계획 추진 보고-대통령 비서실 *행정망․금융망의 추진은 청와대가 조정 지원하고, 나머지 3개 망은 자체적으로 추진하는 것을 원칙으로 함. | |
1984.8 | 국가기간전산망조정위원회 출범 | |
1985.5. | 국가기간전산망 중간 보고 및 행정전산망 추진 계획(안)-국가기간전산 망조정위원회 *5대 망별 사업목표와 중점사업, 전담기관 지정, 1988년초부터 행정망 운용 개시 전산망 보급확장과 이용 촉진에 관한 법률 국회 통과 | |
1985.12. | 국가기간전산망 사업관련 사항 보고-경제수석 8년간 3000억원의 공공기관 수요를 국내 정보산업 육성에 연계함. | |
1986.1. | 다기능 사무기기(워크스테이션) 보급계획(안)-국가기간전산망조정위원 회 *1988년 3월까지 110억원을 투입, 5000여대의 다기능 사무기기기를 구 매 보급 | |
1986.12. | 전산망 보급 확장과 이용촉진에 관한 법률 시행령 국회 통과 *한국전산원 및 한국통신진흥주식회사 출범 | |
[출처] 5.국가기간전산망사업 추진|작성자 핑거팁스 | ||
◇세계 최고의 IT 인프라 갖추는 계기로
국가기간전산망 추진체계는 1987년 정권 교체 시기와 맞물려 청와대 주도에서 각 부처 중심으로 이전된다. 전산망조정위원회도 청와대에서 체신부 소속으로 옮겼다.
국가기간전산망 사업은 행정전산망 구축과 국산 주전산기 및 슈퍼컴퓨터 개발 프로젝트까지 이어지는 정보화의 거대한 물결을 이뤄내는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1990년대 지방정부와 공공기관까지 확대된 정보사회종합대책, 1996년에는 민간 부문을 포함한 범국가적인 정보화추진기본계획으로 이어졌다. 1980년대부터 21세기 초반까지 우리나라 정보화와 정보산업 발전을 아우르는 핵심 연결고리가 된 셈이다.
국가기간전산망 사업은 특히 우리나라가 세계 어느 나라보다 인터넷을 빨리 수용하고 소화할 수 있게 해 준 요인이 됐다는 평가도 받는다. 국가기간전산망 사업이 축적해 놓은 인프라와 마인드 효과가 그만큼 컸던 것이다.
사실 국가기간전산망 구축사업은 1980년대 초반까지는 세계 어느 나라도 감히 시도하지 못한 혁신적인 아이디어였다. 빌 게이츠와 로스페로 등 미국 정보산업계 거물들도 사업참여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찾아올 정도로 해외에서도 큰 관심을 끌었다. 국가기간전산망 구축 사업은 바로 우리나라를 IT 강국으로 우뚝 서게 한 토대를 세운 초석이었다.
# 실현 단계
정보고속도 구축 단계, 공공부문전산화 추진 활용단계(국가정보화시장50%),
국산 주전산기 개발 활용을 통한 국내 정보산업육성 선도단계.
1) 전국적 "정보고속도" 구축.<경부고속도로 같은>
# 구축 운영관리 주체 : 한국데이타통신(주) 창설.
선진국들은 일찍부터 통신기술과 컴퓨터기술의 융합으로 데이터통신이라는 새로운 서비스가 전개됨에 따라 그 가능성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데이터통신이 국가사회 발전에서 차지하는 역할을 인식하고 이를 적극 활용하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여 온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1970년대 말까지 데이터통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정보이용 관점에서 낙후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1980년대 초반까지 우리나라에서 데이터통신의 이용이 은행의 온라인서비스, 비행기와 열차의 좌석예약시스템 등에 그쳤다. 그러나 이들 서비스 이용이 급증됨에 따라 데이터통신 육성정책이 마련되지 않을 경우 전화적체에 비견될 수 있는 데이터통신 공급부족 사태가 발생할 우려가 높았다. 또한 당시 우리나라에 보급된 컴퓨터와 단말기는 기종이 다양하고 시스템별로 개별 운용되고 있어서, 기종이 다른 컴퓨터간에는 상호접속과 호환이 불가능했다. 그리고 정보처리업체나 전산시스템 자가운영업체의 난립으로 시스템의 표준화, 부가장치나 파일의 표준화 등이 조속히 마련되지 않을 경우 상당한 혼란이 야기될 가능성도 컸다. 따라서 표준화를 포함해 데이터통신을 체계적·종합적으로 육성·발전시킬 수 있는 전담기구가 설립이 시급했다.
당시 데이터통신은 대부분 저속의 음성급 전용회선을 이용했다. 그런데 이 전용회선을 광대역회선의 데이터통신 전용 교환망으로 대체하면 통신회선의 공동활용이 가능해져 이용효율을 대폭 제고시킬 수 있었다. 또한 중소기업도 교환망을 이용할 경우 싼 요금으로 자신의 컴퓨터통신망을 구성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선진국과 같이 우리나라에서도 데이터통신 전용교환망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급속히 확산되었다.
1980년 말 체신부는 데이터통신 육성정책 방안을 수립하여 정부방침으로 확정했다. 이 정책 방안에서 데이터통신 전담회사를 설립할 필요성이 강력히 제기되었고, 또한 이 전담 회사가 순수 민간회사 형태라야 한다는 점도 지적되었다.
1981년 8월 10일에는 데이터통신 육성추진계획이 수립되었다. 이 계획에 따라 체신부장관을 위원장으로 하고 체신부 간부 6명과 외부 전문가 7명으로 구성된 데이터통신 전담회사 설립 추진위원회가 발족되었다. 그 해 11월 3일 제5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 통신부문 실천계획이 수립되면서 한국전기통신공사와 민간기업의 합작투자로 1982년 초까지 회사를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1982년 3월 10일 회사설립을 위한 창립총회가 개최되어 정관이 확정되었다. 그 해 3월 29일 회사 설립등기 절차가 완료되어 마침내 한국데이타통신(주)이 정식으로 발족되었다. 한국데이타통신은 경영의 전문성과 독자성을 보장하기 위해 상법상 주식회사로 설립되었다. 따라서 국내에서 최고수준의 엘리트 고용이 가능하게 됨.
<한국데이타통신(주) 초대사장: 이용태박사>.
한국데이타통신은 1982년 4월 체신부로부터 데이터통신역무 허가를 받아 우리나라 최초로 부가가치통신사업자로서 법적 지위를 확보했다. 이 회사는 1983년 해외 데이터뱅크와의 연결서비스를 개시했고 1984년에는 공중정보통신망, 즉 데이터통신 전용교환망을 구축하여 상용서비스를 시작했다<X25 파켓교환망>. 이후 전자사서함, 비디오텍스서비스<천리안> 등 각종 데이터통신서비스를 개발하여 상용화했다. 또한 한국전기통신공사로부터 특정통신회선(데이터급 전용회선) 관리업무를 인수받음으로써 안정적 투자재원을 확보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데이타통신(주) 발족 (기록으로 본 한국의 정보통신 역사 2, 2012. 11. 12., 진한엠앤비 편집부)
<비화> 프랑스의 정보고속도(TRANSPAC)을 배우자
X25파켓교환망 & 공공영역뿐만이 아니라 가정영역까지 전산화 실현.
<비화>국내 정보고속도(X.25 파켓망) 무용론
국내 최다 설치된 {IBM컴퓨터}를 파켓망에 연결하면 주컴퓨터의 성능 뿐만이 아니라 통신 속도가 너무 느려서 사실상 사용불가 따라서 정보고속도 무용론 대두. IBM사에 아무리 암력을 넣어도 별 효력이 없음
그런데 당시 세계 최대의 X.25 공중파켓망을 운영하고 있는 프랑스의 경우도 대부분이 {IBM}일 터인데 전국적으로 X25파켓교환망을 사용함에 있어 이런 문제가 안 생기는 건 무슨 이유일까???
프랑스로 출장가서 알아보기 시작.
각고 끝에 원인과 해결책을 알아냄 : IBM컴퓨터의 경우는 X25에 연결되는 경우 프로토콜 변환을 주컴퓨터에서 100% S/W로 해결하기 때문에 메인컴퓨터의 성능도 저하되고 통신도 느려질 수 밖에 없다. 이는 마치 회사 사장이 하찮은 통역일까지 맡아야 하니 사장노릇도 통역노릇도 제대로 할 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던 것이었다. ===> <해결책> H/W수준의 프로토콜 번역기 : "SDLC PAD"!!!
따라서 IBM-Korea에게 SDLC PAD를 공급해달라고 요구 ===> 그런데 IBM측에서는 그런거 모른다고 오리발. ====> 미국본사에 까지 압력을 가해도 마찬가지.
다시 프랑스로 달려가서 여기 저기 쑤셔대며 분석시작. ====> 드디어 이유 알아냄 : SDLC PAD는 IBM 제품이 아니라 제3자가 만들어 공급하는 제품임!!!
===> SDLC PAD 국산개발( 데이타통신(주) 연구소) & 보급함으로써 문제가 해결됨.
2) 한국형 정보통신서비스: 공중데이타통신망을 통한 천리안 서비스 개발구현.
가정에도 정보통신서비스 : 일반인들도 이해하기 쉬운 "멀티미디어 형 정보" 를 정보고속도를 통해서 전국 서비스
- 기술 : 프랑스 방식 /미국방식 /일본방식 비교분석----> 미국방식 채택 (알파지오메트릭방식)
- 전용단말기/ PC with Emulator
- 천리안 서비스
3) 행정전산망 사업 일괄 추진
---> 동시추진 (국가정보화 & 정보산업육성 )
[ national administration network , 行政電算網 ]
행정전산망은 국가기간전산망 중에서 파급효과가 가장 큰 사업으로
1) 작고 효율적인 정부의 구현,
2) 대국민 행정서비스의 향상,
3) 그리고 행정전산화에 소요되는 투자를 국내 정보산업 육성에 활용 한다는 목표로 추진하는 사업이다.
정부의 전산화 업무 중에서 전체 국민의생활과 직접 관련된 주민등록관리, 부동산 관리, 자동차관리, 고용관리, 통관관리, 경제통계관리 등 6개 우선업무를 선정, DACOM을 전담사업자로 지정하여 '87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하여 왔으며 '90년부터 대민 서비스를 실시하고 있다. 행정전산망은 15개 시·도와 내무부, 교통부 등 업무별 주관기관에 161대의 국산 주전산기를 설치하고 4천 3백여 일선행정기관에 보급된 개인용 컴퓨터 13,168대를 5,486개의 통신회선으로 연결하는 방대한 사업으로 순수 국내기술과 장비로 구축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행정전산망 (매일경제, 매경닷컴)
요약) 국가 행정기관들을 통신망으로 연결하여 행정정보를 공유할 수 있게 함으로써 대국민 서비스를 일괄적으로 처리할 수 있게 하는 국가기간 전산망.
1984년부터 정부가 국가기간전산망 사업으로 구축하고 있는 행정전산망은 1987년 행정전산망 종합계획을 확정함과 동시에 시작했다. 1987년부터 1991년까지 제1차 행정전산망 사업기간 중에 전국 15개 시도에 전산본부와 160대 주전산기를 설치했으며, 일선 행정기관(읍 면 동 사무소)에 4,300여 대의 PC를 보급했다. ===> Unix 기반 운영체제를 갖춘 국산 주전산기 개발 사업
행정전산망은 정부의 행정기관들을 단일 통신망으로 연결하여 행정정보를 공유할 수 있게 함으로써 대민 서비스의 향상과 능률적인 행정을 실현하는 것이 목적이다.
각종 인허가 업무의 신속한 처리는 물론 각종 생활정보도 제공하며, 각종 행정업무 중에서 대민행정과 직결되는 지방세, 민원행정 등의 주요 업무를 단계적으로 전산화하여 행정정보를 공동 활용하고 지방과 중앙, 지방과 지방 간을 연결하는 지방행정 종합정보망도 구축, 지역간 정보격차해소를 통한 지역 균형발전을 도모한다.
행정전산망은 41개 프로젝트를 전산화 대상사업으로 선정하고, 그중 주민등록관리, 부동산관리, 자동차관리, 통관관리, 고용관리와 경제통계업무등을 6대 우선 추진사업으로 확정하였다.
행정자치부 주관하에 추진된 주민등록 관리업무는 제1차 행정전산망사업 중 가장 규모가 크고 방대한 핵심사업이다. 주민등록 관리 전산망사업은 전국민의 성명, 주소 등 11개 분야 78개 필수항목< 실제 서류상 151개 항목 중 중복 /불필요 항목 배제>을 종합, 전산화하고 전국 3,600여 읍·면·동사무소와 유관 부처 및 공공기관을 온라인으로 연결하는 사업이다.
행정전산망과 연계하여 정보화 촉진을 위한 여건 조성으로 정부는
1) 전담사업자 선정<한국데이타통신(주): 데이콤의 전신> : 공공부문 전산화 일괄추진
2) 사후정산 방식 채택 <==== "전산망 이용 촉진법"
3) 주전산기 국산화 사업 : 유닉스 기반 주전산기 개발 : 한국데이타통신 주관 5대 기업 참여 정부 & 산학연 공동 추진.
4) 1997년 9월, 21세기 멀티미디어 정보사회의 인프라 구축을 위해 1995년 3월부터 추진해 오던 초고속정보통신기반 구축계획을 수정·보완한 정보통신망 고도화 추진계획을 수립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행정전산망 [national administration network, 行政電算網] (두산백과)
◇세계 최고의 IT 인프라 갖추는 계기로
국가기간전산망 추진체계는 1987년 정권 교체 시기와 맞물려 청와대 주도에서 각 부처 중심으로 이전된다. 전산망조정위원회도 청와대에서 체신부 소속으로 옮겼다.
국가기간전산망 사업은 행정전산망 구축과 국산 주전산기 및 슈퍼컴퓨터 개발 프로젝트까지 이어지는 정보화의 거대한 물결을 이뤄내는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1990년대 지방정부와 공공기관까지 확대된 정보사회종합대책, 1996년에는 민간 부문을 포함한 범국가적인 정보화추진기본계획으로 이어졌다. 1980년대부터 21세기 초반까지 우리나라 정보화와 정보산업 발전을 아우르는 핵심 연결고리가 된 셈이다.
국가기간전산망 사업은 특히 우리나라가 세계 어느 나라보다 인터넷을 빨리 수용하고 소화할 수 있게 해 준 요인이 됐다는 평가도 받는다. 국가기간전산망 사업이 축적해 놓은 인프라와 마인드 효과가 그만큼 컸던 것이다.
사실 국가기간전산망 구축사업은 1980년대 초반까지는 세계 어느 나라도 감히 시도하지 못한 혁신적인 아이디어였다. 빌 게이츠와 로스페로 등 미국 정보산업계 거물들도 사업참여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찾아올 정도로 해외에서도 큰 관심을 끌었다. 국가기간전산망 구축 사업은 바로 우리나라를 IT 강국으로 우뚝 서게 한 토대를 세운 초석이었다.
4) 한국형 주전산기 개발사업
<비화> 국가관리 업무에 불완전한 유닉스를 활용하다니??
- 미국 유명대 교수 + 컴퓨터전문가 들 20명 정도가 데이콤 연구소장 백인섭 소환 청문회 실시(1:20 청문회)
# 백인섭 응답
- 유닉스의 불완전성은 잘 알고 있다.
- 우리가 하려는 것이 국가관리 전산망시스템 구축이기 때문에 국가적 안전관리가 이루어져 함.
따라서 외국시스템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는 없음. 즉 OS의 국산화가 필수!!<동의함>
- IBM은 고사하고 TANDEM 컴퓨터 활용경우도 OS 소스제공은 절대 절대 불가하다고 응답
- 따라서 기존의 잘증명된 미국산 컴퓨터들은 사용이 불가( 운영체제 소스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
- 대안: 운영체제를 국내개발 또는 소스가 공개되는 유닉스 사용 : 전자는 사실상 불가하니 대안은 유닉스를 사용하는 수 밖에 --------> 그런데 불완전성??? ----->> 유닉스를 개량해서 사용!!
때마침 실리콘벨리에는 "New Wave" : Unix Based Commercial Computer 개발 판매하려는 벤쳐기업들이 우후 죽순 생겨나는 상황. <동의함>
- 따라서 내가 죄가 있다면 국가전산화작업에 애국독립심을 적용한 것 뿐. < 모두 끄덕임>
따라서 개량방안을 모색하고자 미국의 동부 서부 실리콘벨리를 2번씩 뒤짐 -------> 마침 당시에 실리콘벨리에 새로운 물결이 일고 있었다. "New Wave" : Unix Based Commercial Computer 개발 판매하려는 벤쳐기업들이 우후 죽순 생겨나는 상황.
---> 그중 3개( Enmas, Tolerent, Encore)를 골라 집중조사 탐구(개발자와 직접 회의 상담)
-----> 기종선종의 충돌 :
<비화> 첨예한 선택에서는 최고 대신 차선이 선택되는 법
# 백인섭 주장(데이콤 연구소장)이용자 측 : 1) Enmas 2) Tolerent 3) Encore
# 전길남 주장(전자연구소소장) 개발자 측: 1) Encore 2) Tolerent 3) Enmas
----> 따라서 기종 선정 지연
------> 년말11월 이용태 박사 속초 콘도로 백인섭과 전길남을 불러서 끝장토론을 시킴
------> 이용태박사 기종선정 결단 : "Tolerent": 양측에서 2위
------->백인섭 & 전길남 동의. -------> 공식선포.
# 기타 주요관련 야화.
<비화> 눈에 보이지 않는 소프트웨어 비용 문제?
<비화> 한국에서의 컴퓨터 가격? : S/W : H/W = 0 : 100
<비화>법정 주민정보 항목 수 중 30%만 사용
----> 70%를 버린다: 있을 수 없는 일??
서류상 151개 항목 중 56항목만 선택하고 나머지는 버림------> 공무원생각: 있을 수 없는 일.----> 백인섭: 만약 문제가 생기면 내가 책임지겠다고 큰소리 치면서 설득---> 문제발생 없음.
<비화> 전산화비용(S/W비용 .vs. H/W비용) ?
- 선진국 경우 : 20 : 80
- 후진국 경우 : 0:100
- 당시 한국경우 : 암묵적 (50: 50) 공식적(0:100)
<비화> 한글 : 풀어쓰기 / 모아쓰기 ?
# 풀어쓰기 주장 우세-----> 컴퓨터성능개선-------> 모아쓰기 : 세조대왕님 죄송
<비화> 한자 수용문제
:한글 수용도 어려운 판국에 몇백배 복잡한 한문 수용은 불가하다 ???>
# 그런데 대만에서 본 한자문서 전자화 작업 속도 : 영어 보다도 빠름. ----> 패턴인식 기술 사용!! 따라서 가능하다고 판단!!!
<비화> 행정전산망사업비용이 어마어마하다고?
: 천만의 말씀<홍성원박사>
- 10년간 7000억 정도 투자가 어마어마 하다고??.
- 이대로 가다간 국가 전산화가 나라 말아먹을 판
당시 한국에서 미국 컴퓨터회사로 지불되는 컴퓨터 렌트비용이 년 2억불 수준이었는데 그 중 50%가 공공부문이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별로 살펴보면 전산화된 것이 거의 없는 지경. 이런걸 왜 전산화하지 않았느냐 따지면 항상 대답이 그걸 하려면 컴퓨터를 확장해야 하는데 예산이 부족해서 못한다는 대답. 그래서 매년 전산화예산은 죽어라고 증대하기만 하는 상황 -------> 현재 수준만으로도 연 1000억 정도가 컴퓨터 렌트비용으로 나가니 이것만 10년 모아도 1조가 되니 거기다 개발운영비용까지 합치면 안되도 몇 조원 규모가 되니 이러다간 전산화를 통해서 경제성과 효율성 도모는 커녕 국가를 말아먹겠다는 위기감 고조되는 상황 !!
<비화> 이용태 박사의 눈물 (비행기 속에서)
항상 잘나가는 사람에게는 마가 끼게 마련이다. 당시 이용태 박사의 기발한 아이디어와 헌신적 노력으로 위대한 성공이 이루어지니까 이를 시기질투하는 무리들이 온갖 모함을 조작 퍼뜨림.
그 중 가장 유치찬란한 모함이 주전산기 기종 선정에서 뇌물을 먹었다는 것이었다. 이제 막 돌을 지내면서 자금난에 허덕이는 벤쳐기업에 그것도 단돈 50만불 투자로 그들이 개발한 OS 소스를 구입하겠다는 것이 뇌물이라고??? 뇌물이란 몇 100만불 짜리 컴퓨터를 유명업체에서 그냥 도입해서 사용할 때나 주고 받는 거지 이렇게 코 묻은 돈에 죽기살기로 매달리는 흥정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일. 이용태 박사는 국가기간전산망 사업에 전념하느라 자신이 세워서 키운 삼보컴퓨터도 돌보지 못했는데, 그리고 대만에서 이용태박사한테 배워서 세운 컴퓨터회사가 그동안 성장해서 세계적 기업이 되어 억만장자가 되었는데 나는 억만장자는 커녕 이런 지저분한 누명이나 쓰고 있다면서 눈물까지 보였다. 참으로 안타까웠다. 그러나 어쩌랴 이런게 세상이니. 더구나 배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참지 못하는 게 이 나라 사람들이니.
한국 인터넷의 역사
답글삭제되돌아보는 20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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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감수의 글
일러두기
들어가며: 한국 인터넷 개발의 정신
1장. 한국 인터넷의 태동
1.1 인터넷의 기원들
1.2 한국 인터넷의 기원, SDN
2장. 글로벌 인터넷 구축
2.1 SDN의 확장
2.2 SDN과 해외 네트워크의 연동
2.3 태평양 컴퓨터 통신 국제학술대회, 그리고 아시아넷
2.4 국제전용회선망을 사용한 인터넷
3장. 국가기간전산망
3.1 행정전산망
3.2 교육연구망
4장. 인터넷의 대중화
4.1 PC 통신 사용자들
4.2 월드와이드웹
4.3 KRNET과 WWW-KR
4.4 상용인터넷 서비스(ISP)
5장. 온라인 게임
5.1 온라인 게임의 태동
5.2 온라인 게임의 팽창
5.3 게임 벤처
6장. 스타트업
6.1 인터넷 언론
6.2 전자지불시스템과 전자상거래
6.3 혁신적 인터넷 서비스들
6.4 포탈
6.5 정보엑스포 '96
7장. 초고속 인터넷
7.1 PC방의 확산
7.2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계획
7.3 두루넷, 최초의 초고속인터넷 서비스
8장. 인터넷 조율
8.1 민간 중심의 자율적 기구 형성
8.2 한국인터넷정보센터
8.3 국내 인터넷 표준의 자율적 관리
맺음말: 인터넷 선도사회를 향하여
참고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