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 6일 일요일

 

이 땅의 등산 문화 무엇이 문제인가: 얻은 것과 잃은 것

                                                             2001.11 요델산악회 백인섭

 이 땅의 등산문화는 그 역사가 일천하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놀라운 발전을 거듭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발전한 것 만큼 잃은 것도 많은 듯 하다. 눈부시게 발전한 것은 우선 첨 단 등반 장비들이고 이로 인한 새로운 등반 기술들이고 전문 등산인구와 프로등산인의 전국 적 저변 확대이고 또한 해외 원정등반의 보현화일 것이다. 그러나 요즘 새롭게 창출되는 등 반 문화를 가만히 살펴보면 예전에 있었던 좋은 것들이 상실되고 있는 듯 싶어 애석한 마음 도 든다. 

우선 너무 전문화되다 보니 한 분야에만 너무 치우치게 되어 산이 우리 인간에게 주는 다양하고 총체적인 것들을 놓치고 있는 듯 하다. 산에는 험함과 어려움만 있는 것이 아니라 깊은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은 물론 심오한 철학까지 있는 것이다. 따라서 등산을 하 면서 산에 빠져든다는 것은 단순히 모험적 운동에만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 산을 소재로 하 는 각종 예술 문학 내지는 철학에도 빠져드는 것을 의미하며 이러한 것들이 어우러져 산악 정신과 산악문화를 형성하는 것인데 요즘 우리의 산악문화를 보면 이러한 깊은 맛이 결여된 듯 하다. 

일반 등산문화는 얕은 유희성 수준에 머물고 전문 등산문화는 형식적 화려함만을 추구하는 형식성 수준에 머물고 있다. 아마도 등산인구의 엄청난 증가와 이에 대처하는 엄 격한 산 관리로 인해서 예전처럼 산속에서 호젓하게 야영하면서 모닥불 곁에서 밤을 지새우 며 산과 하나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음도 우리 등산문화의 삭막화에 한 가지 이유가 되리라 생각된다. 또한 끝없이 발전하는 첨단 장비와 기술로 인해서 높고 어려운 산들이 점 점 낮아지고 쉬워지고 있다. 계속 이렇게 되면 결국 이땅의 모든 산은 등산의 대상으로서의 가치를 잃어 버리고 그냥 무슨 훈련장이나 놀이/휴식 공원 정도로 전락해 버릴 것이다. 이 는 우리에게 많지 않은 소중한 것들을 잃어가고 있는 꼴이 되어 애석하기 그지 없다. 마치 요즘 자동차 문화 덕분에 전국 어느 산이든 마음만 먹으면 근교 산처럼 하루 이틀에 해 낼 수 있다는 굉장한 발전(?)이 그 이면에 우리로부터 먼 곳을 박탈해 버린 것과 같은 현상이 다. 먼 곳은 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항상 우리에게 신비스럽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인데 이런 것을 잃어가면서 편이성만을 추구하면서 모든 것을 가깝게 그리고 쉽게만 만들어 가는 것이 과연 현명한 것인지 이제는 우리 모두 한번쯤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등산 장비란 산을 오르기 위한 또는 산에서 숙식을 해결하기 위한 도구들이다. 도구와 문 화는 상호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관계이지만 일반적으로 우리의 문화는 오랜 역사 속에서 도구를 경시해 오다가 근대에 들어서 서구의 도구 문화에 접하면서 도구의 위력을 느끼면서 도구문화를 지향한 듯 하다. 도구는 목적을 달성하려는 행위만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경 우에 따라서는 목적 자체를 바꾸고 기본 사상이나 철학까지도 바꾸어버리는 위력이 있다. 등산 문화와 등산 도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요즘 들어 우리의 등산 문화도 그 동안 도 구를 경시하는 등산문화 경향을 취해 오다가 요즘 들어 쏟아져 들어오는 엄청난 장비들과 갈수록 심화되는 편의주의적 이고 목적달성 지상주의적 사고방식이 어우러져 갑자기 도구 만능주의적 등산문화로 탈 바꿈 한 듯 하다. 따라서 새로운 도구와 그에 따른 새로운 기술 이 기존의 등산문화를 마구 바꾸어 버리든지 아니면 새로운 문화를 마구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도구 결정론적으로 새롭게 만들어지는 등산문화는 바람직 할 수도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일방적으로 도구에 쫓기든지 아니면 도구에 의해서 만들어지든지 하는 문화는 자칫하면 인간을 위한 문화가 아니라 도구 를 위한 문화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 정보기술이나 생명과학 기술 등 각종 첨단 기술 에 의해서 일방적(기술 결정론적)으로 펼쳐지고 있는 현대 문화 속에서 어른 아이 할 것 없 이 모두 갈팡질팡하면서 세계의 종말까지를 의식해야 하는 것이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그 래서 문화의 결정을 도구가 아닌 우리 인간이 주도하면서 도구를 적절하게 사용해서 인간을 위한 문화를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등산장비와 등산문화도 마찬가지이리라. 옛 세대인 나 만해도 도구(첨단 등반장비)의 위력을 절감하면서 그로 인해 나의 등산관까지도 송두리째 흔들려 버린 적이 세 번 있었다.

 첫번째로 1971 년 프랑스 샤모니 등산학교에서 처음 신어본 비브람의 위력과 프론트 포인트가 있는 열 발짜리 아이젱의 경이로운 위력이었다. 수직 암 벽에서 5 mm 도 안 되는 스탠스를 비브람 앞 끝으로 딛고 마치 계단을 딛고 서있는 것처럼 편함과 안전함이 느껴졌을 때의 놀라움, 선인봉의 양지길, 허리길, 표범길 등이나 외설악의 범봉, 범봉연봉, 석주길 등 암벽들을 개척할 때 오로지 군용 워카 밖에는 몰랐던 그야 말로 촌놈에게는 충격이 아닐 수가 없었다. 바로 그런 위력적 등산화가 있었기에 알프스의 거벽 들이 등반대상으로 될 수 있었음을 그 때 비로서 깨달았던 것이다. 또한 아이젱의 프론트 포인트를 사용해서 스텝컷팅 없이 빙벽을 마음대로 오르고 내릴 때의 놀라움, 오르다 암벽 을 만나도 그냥 아이젱을 착용한 채로 바위를 한참을 오르다 다시 빙벽이 나왔을 때도 여 전히 아이젱의 발톱이 처음처럼 날카롭게 얼음에 박혀 들어갈 때의 놀라움, 생선장수 장화 에 앞 발바닥 중턱쯤에 앞 이가 걸리는 여덟 발 짜리 아이젱 그것도 하도 약해서 얼음만 올 라도 한 두 시간이면 끝이 무뎌져서 얼음에 잘 박히지 않아 주의를 해야 되는 그런 아이젱 을 신고 자즌바위골 50 m 와 100m 빙폭을 천신 만고 끝에 초등하고 토왕성 빙폭은 그저 보 고 즐기는 경치로만 생각했던 나에게 충격이 아닐 수 가 없었다. 그런 장비라면 토왕성 빙 폭이 그림의 떡이 아니라 오를 수 있는 등반 대상이라는 생각을 바로 그때 가졌던 것이다. 

두 번째로는 80 년대 출현한 각종 프렌드의 요술 같은 위력이었다. 이런 것이 있었다면 선인 봉 표범길 개척 시 그렇게도 나를 불안하게 했던 긴 언더홀드 마지막 끝 부분에서 탈출이 불가능한 경우 예상되는 굉장한 추락에 대한 위험에 아주 쉽게 대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는 예상 못한 역 홀드가 완벽하게 이루어져 있어서 아주 쉽게 언더홀드를 탈출할 수 있었지만) 프렌드 한 두개만 언더홀드 속으로 박아 놓으면 긴 추락을 막을 수 있으니 그것 때문에 몇 달을 고심하고 망설이고 했을 필요가 전혀 없었을 터이니 말이다. 한번은 프렌드 의 위력을 시험하기 위해서 개척 당시 정말 고심했고 끝내는 하켄이 아닌 기상천외의 쇠 막 대 (전신 주에 박아서 사람이 잡고 딛고 오르는 길다란 철 막대)를 두개 박아 천신만고 끝 에 돌파한 선인봉 양지길 2 단의 나팔형 크랙을 프렌드만으로 가능한가 시험해 보았다. 프렌 드 두개로 너무나 쉽게 돌파할 수가 있었다. 정말 믿어지지 않는 대단한 위력이었다. 그토록 어렵고 힘들고 무서웠기에 해법을 찾기 위해서 머리를 쓰고 고심하고 했던 등반 대상이 하 나도 어렵지 않고 힘도 들지 않고 무섭지도 않고 또한 해법을 찾기 위해서 머리를 쓸 필요 도 없고 고심할 필요도 없는 것으로 되 버리는 것이다. 

세 번째로는 90 년대의 빤빤이 암벽화의 경이로운 위력이었다. 워카만 신고 했기에 그 것에 상대적으로 등반 가능과 불가능을 판단했던 나의 판단력을 송두리째 뒤 바꿔 놓은 위력이었 다. 그 것을 처음 신었을 때 발 바닥에 무슨 끈끈이가 부쳐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는 이러한 위력적 장비가 없이는 매우 어렵고 그래서 훌륭한 등반 대상이 이러한 위력적 장비를 가지면 더 이상 등반 대상으로서의 가치를 가지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나는 비 로서 요즘의 클라이머들이 왜 선인봉의 옛 등반 길들을 그저 연습내지는 가볍게 몸 푸는 정 도로 여기고 그렇게 행동하고 있는 가를 이해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내가 한참이던 시절 이러한 위력적 장비들이 없었던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었는지 산신령께 감사하고 싶 은 마음이다. 요즘 같은 위력적 장비들이 없었던 그 시절의 도봉산과 설악산은 유럽의 알프 스나 히말라야와 대등한 높이로 대등한 어려움과 험함과 순수함이 있었던 것이고 그렇기에 나는 거기에 무한히 빠져들 수 있었고 이제까지도 더 높은 산을 전혀 찾고 싶지않을 만큼 충족감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기에 말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이 땅에 하나 밖에 없고 클 라이밍 대상으로서 훌륭했던 선인봉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 말고도 수도 없는 첨단 등반 장비들로 무장한 요즘 등반가들을 보노라면 마치 미국 영화 속의 현대판 슈퍼맨인 일당백의 천하무적 람보를 보는 듯 하다. 그러나 첨단장비 로 무장한 람보 보다는 맨손의 맥가이버가 훨씬 멋지게 느껴짐은 장비 의존적인 람보는 장 비가 없는 경우 위력을 상실하지만 그렇지 않은 맥가이버는 어떠한 환경에서도 위력을 잃지 않기 때문이리라. 


<일반 등산문화> 

 마치 장거리 문화처럼 혼잡하고 떠들썩한 등산문화 우리나라의 산은 대체로 그리 높지도 험하지도 않아 산악인이 아닌 사람들도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는 산들이다. 또한 이땅에는 산에 가는 것 말고는 일반 대중을 위한 여가나 놀이 마당이 거의 없기 때문에 산으로 사람이 몰릴 수 밖에 없다. 혹자는 더불어 먹고 마시고 놀 기 위해서 혹자는 산책이나 운동을 위해서 혹자는 구경하기 위해서 혹자는 극기훈련을 위해 서 말이다. 그래서 비탈길에는 계단이 있어야 하고 계곡에는 철 다리가 있어야 하고 능선에 는 철 난간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곳곳에 쓰레기통과 화장실도 있어야 하고 먹거리를 파는 상점도 있어야 하고 나아가서는 숙박시설까지 있어야 한다. 이대로 가다간 목욕탕이나 까페 까지 들어설지도 모를 일이다. 산을 모조리 깎아 없애고 아파트 숲으로 개발해 버리는 한심 한 도시개발과 다를 바가 없다. 이제 우리의 도봉산 북한산 설악산 한라산 지리산 등 이 땅 의 명산들이 모두 이렇게 만인의 놀이마당으로 개발되어 자연 생태계는 물론이고 산의 정기 와 모습마저 잃어 가고 있는 것이다. 하기야 눈 앞의 조그만 이득을 위해서 무엇이든 무차 별 개발해 버리는 못 말리는 개발도상 국가가 우리의 현 좌표이지만 그래도 이제는 좀 정신 을 차리고 개발로 얻는 것과 잃는 것이 무엇인가 올바르게 따져 보아야 할 때가 아닌가. 

몇 천년 동안 만들어진 값지고 유용한 서해안 갯벌을 개간해서 싸구려 농토를 만드는 어리석음 이나 몇 백년의 역사 유적을 없애 가면서 엉터리 도시를 개발하는 어리석음은 이제 그만 해 야 될 것이 아니겠는가. 자연의 산은 수 백만년 걸쳐서 만들어 지는 것이니 한 번 부수면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이땅에 그리 많지 않은 명산만이라도 이제는 이러한 무차별 개발에서 보호해야 될 것이다.


 <전문 등산문화> 

등산은 전쟁이 아니다. 등산이란 산을 산으로 대하면서 적절한 수단과 방법을 가려 사용해서 산을 오르고 내리는 행위로서 항상 산으로서의 위험과 아룸다움과 경이로움과 어려움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등정 성공에만 집착하면 등산을 전쟁으로 생각하게 되고 따라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리만을 추구하게 되고 승리의 개수나 전과만을 자랑하게 된다. 이렇게 수단과 방법을 가 리지 않고 오르는 행위는 진정한 등산이라고 볼 수가 없을 것이다. 극단의 경우가 헬기나 케블카를 타고 봉우리에 오르는 것이며 이를 등산이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등산도 스포츠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고 게임 룰을 지키면서 해야만 진정한 등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등산의 목적은 그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행위와 느낌 그 자체가 모두 목적이지 정상 정복이나 그 행위의 대가로 얻어지는 어떤 형태의 보상이 목적이 아닐 것이다. 

만약 축구 선수들에게 게임 법칙을 모두 무시해도 좋으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상대에게 이기라는 주문을 하는 경우 과연 그들이 신이 나서 손도 사용하고 축구화 앞에 공을 발사하는 장치가 붙어 있는 첨단 축구화를 사용하고 문지기는 강력한 볼 흡착장 치를 들고 골대를 지키면서 이기는 축구를 하려 할 것인가 한 번 생각해 보자. 그 들이 진정한 축구인이라면 절대로 그리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그리하면 그 것은 이미 축구로서의 모든 매력을 상실하게 되기 때문에 선수도 관중도 더 이상 거기에 매료되어 죽자 사 자 매달릴 이유가 없어짐을 알기 때문이리라. 

등산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정상 정복 또는 승부에만 집착한다면 필연적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 달성을 도모하려 들 것이다. 등산 수단과 방법은 첨단장비의 발전에 힘입어 끝도 없이 발전(?)하고 있으매 언젠가는 손과 발에 이상한 첨단장비를 부착하고 바위 절벽이든 얼음 절벽이든 마치 평지를 걷는 것처럼 마음대로 쉽게 안전하게 오르고 내리는 등산으로 발전하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은가. 그리 된다면 참된 등산가는 더 이상 산에 오를 이유가 없어지게 될 것이 아니겠는가. 등산이 육체적은 물론 정신적으로도 어렵 지 않고 힘들지도 않고 위험하지도 않고 하다면 그 것은 이미 등산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하 게 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것이 등산이 일반 스포츠와 다른 점이다. 따라서 백운대나 포대능선 또는 천불동 계곡 등등 같이 인위적 안전시설과 편의 시설들에 의해서 등산으로서의 어려움과 험함과 위험함이 배제된 등산로를 오른다는 것은 진정한 등산이라고 볼 수가 없다. 이러한 시설물들은 지금이라도 과감하게 제거되어야 한다. 그래야 그나마 병든 산이 자연성 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고 병든 이땅의 산악문화 또한 올바르게 회복될 수 있을 것이고 또 한 산을 찾는 산악인이 아닌 일반인들의 안전사고 또한 보다 예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해 외의 고산등반이나 거벽등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온 갓 첨단장비로 무장하고 온 갓 편리 한 수단들을 동원해서 얻어내는 승리는 진정한 인간의 승리가 아니라 장비와 수단의 승리라 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산악 관리는 과연 필요한 것인가> 

자연이란 원래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을 때 즉 인간의 관리가 전혀 없을 때 완전한 자연으로 서 존재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사람의 손과 발이 닿고 있다면 산을 보호하기 위해서 인간의 관리가 필요해 진다. 더구나 우리나라처럼 엄청난 등산객들이 몰리는 산들의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만약에 관리가 없다면 그런 산들은 순식간에 쓰레기 통으로 변할 것 이고 계곡은 유흥 음식점으로 꽉 들어찰 것이고 산 모퉁이 마다 가게들이 들어설 것이다. 이런 것들을 방지하기 위해서 명산들을 국 공립 공원화해서 관리하는 것은 잘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그 관리가 산악을 인간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관리가 아니라 산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기 위한 즉 등산객의 편이위주 또는 보다 많은 등산객을 유치하기위한 개발 위주의 관리라는 점에서 문제가 있는 것이다. 

미국 같이 국토가 넓고 큰 산도 많고 반대로 등산객이나 유람객들은 오히려 적은 나라에서도 그들의 국 공립 공원 관 리는 인간으로부터 자연을 보호하기위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공원 속의 전체 입장 객 수에 대한 엄격한 통제 관리라든지 또는 보이 스카우트에서 자연 속으로 캠핑을 가는 경우도 자 연환경을 오염시키지 않기 위해서 시내 물에서 세수나 목욕은 고사하고 손도 씻지 못하게 한다니 그들이 얼마나 자연을 보호하기 위한 관리를 하는지 알 수 있지 않은가. 우리나라의 경우는 자연의 규모도 미국과는 비할 바 없이 작고 자연을 찾는 사람은 몇 십 갑절 많은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관리가 전혀 이루어지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오염을 조장하는 관 리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걱정을 안 해도 될 사람들은 오히려 걱정을 하면서 조 심을 하고 정작 걱정을 해야 될 사람들이 .걱정도 조심도 하지 않는 우스운 꼴이라 하지 않 을 수 없다. 

물론 이 땅의 국민이면 이 땅의 명산들을 보고 즐길 권리는 있다. 그래서 관리 공단들이 국민의 권리를 더욱 보장해 주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그 자연을 원상대로 보존해야 하는 의무와 책임이다. 진정한 자유와 권리는 그에 걸 맞는 의무와 책임이 지켜질 때만이 누릴 수 있는 것임에도 우리 국민 수준이 아직은 의무와 책임은 경시하고 권리와 자유만을 주장하는 미 성숙 단계에 있기에 국 공립 공원 관리를 맡은 사람들이 더 더욱 산을 보호해야 하는 의무와 책임(자연을 보존하는) 위주로 관리를 해 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우리의 경우는 원래 집단성이 강한 인종으로 태어났고 거기에 그 것을 조장하는 사 회문화 행태와 공원 관리 공단들의 관리 행태등에 의해서 집단성이 더욱 조장되어 우리 산 의 파괴는 실로 끔직한 경지에 이르고 있다. 일례로 보기만 해도 끔찍한 장면들을 우리는 아주 종종 신문이나 TV 등을 통해서 보며 산에 가면 아주 쉽게 볼 수 있다. 단풍철이 되면 명산 마다 몰리는 단풍놀이 인파, 봄철이면 꽃 놀이 인파, 산봉우리(대청봉,천황봉,한라산,등) 에서 새해 일출 보기 인파, 대청봉 천왕봉 백두대간 등에 몰려다니는 극기 훈련 인파, 시장 거리처럼 밀리는 북한산 도봉산 암릉길의 인파, & 중청봉 꼭지에 지어 놓아 성업중인 대 규모 산장여관에서 와글대는 인파 등이 그것이다. 


<돌아온 노병들이여 >  

나도 그러하지만 요즘 산에 가보면 노구 또는 불구를 끌고 끝내는 다시 산으로 귀향하는 옛 산악인들을 종종 만난다. 몸은 비록 시들고 병들었지만 마음만은 예나 거의 다름이 없어 보 인다.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하지만 영혼도 육체를 따라야 하는 것이 자연의 섭리임 에 시들어 약해진 자신의 현재 육체를 펄펄 나르던 시절의 육체로 착각하지 말고 현재의 육 신으로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산을 대해야 함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산은 그저 지금의 당신만을 상대해서 가혹하리 만큼 엄격하다는 것을 단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젊었을 적 방식과 태도를 고집하든지 아니면 요즘 젊은이들의 방식과 태도를 따라 하려 하면 좌절만 있을 것이고 설사 성공한다 해도 무리가 클 것이고 그 다지 멋스럽지도 않지 않겠는가. 마치 늙은 여자가 애들처럼 화장하고 옷 입고 행동하면 어떻겠는가. 고목은 고목으로서의 의미와 형식을 가질 때 멋스러운 것이지 고목이 꽃을 피우려 애를 쓰면 핀다 해도 오히려 추하든지 아니면 애처로울 뿐이 아니 겠는가. 

산 뿐이 아니라 우리사회의 모든 문화가 점점 애들 쪽으로만 변해가는 현실에서 어른의 문화 나아가서 노인의 문화를 산에서도 찾아 세우는 것도 우리가 올라야 될 또 한 개의 고봉이 아니겠는가. 삶의 의미가 소년시절 청년 시절 장년시절 노년시절이 각각 다르듯이 산과 등산의 의미도 다르지 않겠는가. 청년이 노 장년과 달라야 하듯이 노 장년은 청년과는 달라야 할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야 말로 바로 이제부터 내가 올라야 될 미지의 힘들고 험난한 산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글을 마치고자 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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